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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도전과 국제 work camp!
작성자 구** 작성일 2009-04-29 조회수 815
아래 글은 복수전공, 영어연극 staff, 국제자원 봉사 참여 등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학과 3년 김지은 양의 국제 워크 캠프 참여 경험담이자 감상문입니다.  김양의 이러한 삶의 모습, 무척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음악과 함께 이 곳에 수기 올려 봅니다.                                                                  9월 3일 학과장
   
배경음악: 첨밀밀(甛蜜蜜)! (등려군:登麗君) 

 끊임없는 도전과 국제 워크 캠프!!!

                                                                              영어영문학과 3학년 김지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든 무엇이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무언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또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기회가 되면 내 인생에 가장 멋진, 그러면서도 후회 없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말이다.


2007년은 개인적으로 내게 참 힘든 해이기도 하다. 경영학과 복수전공이라는 엄청난 과제가 나를 압박했고 그 속에서 나는 차츰 내 모습을 잃어갔고 무언가 활력소가 될 만한 것이 절실했다. 나 자신을 모르는 전혀 낯선 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진정 당당한 예전의 “김지은”이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도전하고 성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지난 3주 동안의 국제 워크 캠프(international work camp)이다.


국제 워크 캠프는 자원봉사라는 큰 틀 안에서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며 배워나가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국제 워크 캠프로 참가하기로 결정한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7살 꼬맹이였을 때 읽었던 책을 통해 동경이라는 큰 의미로 다가왔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내가 프랑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 그들은 진보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했고 혁명을 통해 쟁취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할 나라를 내가 동경하는 프랑스로 선택했고 머나먼 유럽에서의 홀로 서기를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유럽으로 떠나기 딱 일주일 전이다. 국제 워크 캠프 단체인 IWO로부터 내가 참가하기로 한 워크캠프가 현지 사정으로 취소가 돼서 급하게 다른 워크 캠프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 더러 어쩌라는 건지..참 떠나기 일주일 전에 이런 소식 들으면 앞이 막막하다. 남은 캠프의 정보를 살펴보니 모두가 hard working을 강조했고 대부분이 텐트 생활이었다. 3주 동안 텐트 생활을 해야 한다니 앞이 막막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내가 자초한 일이였고 나는 부랴부랴 다시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고 프랑스 단체 측에 연락을 취해 어렵게 다시 워크 캠프 확정을 받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파리에 도착했고 낯선 환경 속에서 혼자 힘으로 워크캠프 장소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3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Evron 역에 도착 했을 때 워크캠프의 리더와 한국인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 한국분이 나를 보자마자 한 첫마디는 바로 “좀 많이 힘드시겠네요...” 물론 나도 힘들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인포쉿을 받았을 때 계속해서 hard working을 강조했고, 그리고 3주 동안 텐트 생활을 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고.. 그러나 워크 캠프 장소에 도착한 후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힘들 것이라고 어려울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견뎌야 된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나인데, 생각했던 것 훨씬 그 이상으로 워크 캠프 환경은 최악이었다. 마치 전쟁 영화에서나 본 듯한 짙은 녹색의 군대 막사가 바로 내가 3주 동안 생활해야만 하는 텐트였고, 그 안에는 야전 침대와 비슷한 10개 남짓의 침대가 널려 있었다.


‘많은 기대를 하였는데, 아 이런 것이구나!’ 주어진 환경에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대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웃음 지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터키,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세르비아, 앙골라에서 온 워크 캠프의 구성원은 총 10명이였다. 보통 한국 같은 경우는 워크 캠프는 대학생이 많이 지원하고 참여하는 편인데, 외국은 그렇지가 않았다. 참여자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어린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방학을 빌려 주로 이런 봉사활동에 참여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꽤나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가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눠야할 지 몰랐고, 나 같은 경우는 너무나도 영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살짝 기가 죽어서 말을 걸지 못했던 경향도 있었다. 이렇게 다국적 친구들과의 첫 만남, 그리고 텐트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워크 캠프의 목적은 두 가지다. 봉사활동, 그리고 다양한 국가에서 온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장소는 중세시대의 성으로서 프랑스에서는 historical site로 지정되어서 꽤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Saint-Suzzane이라는 성이였다. 성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모두는 Saint-Suzzane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바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였다. 성벽 재건이라 해서 굉장히 거창한 의미로 해석하는 분들이 계실 터인데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문화재 복원 정도로 해두자. 사실 말이 문화재 복원이지 완전 막노동이었다.


중세시대 성이라서 모든 것이 돌로 만들어져 있다. 성 안의 건물들도 하나하나 돌로 쌓아올려져 있고 성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성벽 역시도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성벽의 허물어진 부분을 다시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무지 힘들었다. 물론 이런 힘든 일을 선택한 것은 나였다. 한국에서는 여자는 절대 이런 막노동의 경험을 할 수 없었고, 적어도 나는 어린 나이에 막노동과 같은 힘든 일을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모두가 “너는 노가다 하러 유럽까지 가냐?”라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말이다.


캠프 생활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우리는 직접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일주일마다 요리와 청소 팀을 정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점심, 저녁 메뉴를 결정하고 시내로 장을 보러 가곤 했다. 단 한가지의 요리도 할 줄 몰랐던 나는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불고기 양념을 한국에서 가져갔고, 내가 요리 당번이었던 그날, 나는 저녁으로 불고기와 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 외국인들이 불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고 알았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이야. 너무 맛있게 먹어준 친구들에게 나는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준비해온 선물을 나눠주면서 그 선물의 의미를 이야기해줄 때, 그때 외국 친구들은 너무나도 즐거워했다. 특히 효자손을 선물하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의미를 설명해주었을 때 나름대로 꽤나 뿌듯했고, 외국 친구들이 텐트 안에 선물 받은 효자손을 고이고이 걸어두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참 기쁘고 즐거웠다.


3주 동안의 워크캠프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참 많았다. 그 때마다 내 곁에는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농담을 해주고 나를 도와주던 외국인 친구들이 있었다. 워크 캠프를 오기 전 나에게 있었던 힘들었던 일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던 그 시간들.. 텐트 안에서 침낭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세르비아에서 온 친구와 옛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울고 웃던 추억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내 자신에 대한 많은 생각과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했던 순간들.. 넓고 푸른 잔디밭에서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들었던 진정 내가 꿈꾸던 평화..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조차 의심했던 나에게 다시 나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던 지난 3주간의 잊지 못할 추억들.. 외국인들조차 당당하고 용감하다고 칭찬했던 뜨거운 태양 아래 나의 모습들..


나는 22살이다. 아직 어리고 배울 것이 많기에 나는 새롭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도전하고 성공하고 설령 실패한다 할지라도 아주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것을 시도하고 깨달아가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의 20대가 반짝반짝 빛이 날 수 있도록 말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국제 워크 캠프!!!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든 무엇이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무언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또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기회가 되면 내 인생에 가장 멋진, 그러면서도 후회 없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말이다.


2007년은 개인적으로 내게 참 힘든 해이기도 하다. 경영학과 복수전공이라는 엄청난 과제가 나를 압박했고 그 속에서 나는 차츰 내 모습을 잃어갔고 무언가 활력소가 될 만한 것이 절실했다. 나 자신을 모르는 전혀 낯선 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진정 당당한 예전의 “김지은”이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도전하고 성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지난 3주 동안의 국제 워크 캠프(international work camp)이다.


국제 워크 캠프는 자원봉사라는 큰 틀 안에서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며 배워나가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국제 워크 캠프로 참가하기로 결정한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7살 꼬맹이였을 때 읽었던 책을 통해 동경이라는 큰 의미로 다가왔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내가 프랑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 그들은 진보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했고 혁명을 통해 쟁취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할 나라를 내가 동경하는 프랑스로 선택했고 머나먼 유럽에서의 홀로 서기를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유럽으로 떠나기 딱 일주일 전이다. 국제 워크 캠프 단체인 IWO로부터 내가 참가하기로 한 워크캠프가 현지 사정으로 취소가 돼서 급하게 다른 워크 캠프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 더러 어쩌라는 건지..참 떠나기 일주일 전에 이런 소식 들으면 앞이 막막하다. 남은 캠프의 정보를 살펴보니 모두가 hard working을 강조했고 대부분이 텐트 생활이었다. 3주 동안 텐트 생활을 해야 한다니 앞이 막막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내가 자초한 일이였고 나는 부랴부랴 다시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고 프랑스 단체 측에 연락을 취해 어렵게 다시 워크 캠프 확정을 받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파리에 도착했고 낯선 환경 속에서 혼자 힘으로 워크캠프 장소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3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Evron 역에 도착 했을 때 워크캠프의 리더와 한국인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 한국분이 나를 보자마자 한 첫마디는 바로 “좀 많이 힘드시겠네요...” 물론 나도 힘들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인포쉿을 받았을 때 계속해서 hard working을 강조했고, 그리고 3주 동안 텐트 생활을 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고.. 그러나 워크 캠프 장소에 도착한 후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힘들 것이라고 어려울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견뎌야 된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나인데, 생각했던 것 훨씬 그 이상으로 워크 캠프 환경은 최악이었다. 마치 전쟁 영화에서나 본 듯한 짙은 녹색의 군대 막사가 바로 내가 3주 동안 생활해야만 하는 텐트였고, 그 안에는 야전 침대와 비슷한 10개 남짓의 침대가 널려 있었다.


‘많은 기대를 하였는데, 아 이런 것이구나!’ 주어진 환경에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대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웃음 지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터키,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세르비아, 앙골라에서 온 워크 캠프의 구성원은 총 10명이였다. 보통 한국 같은 경우는 워크 캠프는 대학생이 많이 지원하고 참여하는 편인데, 외국은 그렇지가 않았다. 참여자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어린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방학을 빌려 주로 이런 봉사활동에 참여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꽤나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가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눠야할 지 몰랐고, 나 같은 경우는 너무나도 영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살짝 기가 죽어서 말을 걸지 못했던 경향도 있었다. 이렇게 다국적 친구들과의 첫 만남, 그리고 텐트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워크 캠프의 목적은 두 가지다. 봉사활동, 그리고 다양한 국가에서 온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장소는 중세시대의 성으로서 프랑스에서는 historical site로 지정되어서 꽤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Saint-Suzzane이라는 성이였다. 성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모두는 Saint-Suzzane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바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였다. 성벽 재건이라 해서 굉장히 거창한 의미로 해석하는 분들이 계실 터인데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문화재 복원 정도로 해두자. 사실 말이 문화재 복원이지 완전 막노동이었다.


중세시대 성이라서 모든 것이 돌로 만들어져 있다. 성 안의 건물들도 하나하나 돌로 쌓아올려져 있고 성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성벽 역시도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성벽의 허물어진 부분을 다시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무지 힘들었다. 물론 이런 힘든 일을 선택한 것은 나였다. 한국에서는 여자는 절대 이런 막노동의 경험을 할 수 없었고, 적어도 나는 어린 나이에 막노동과 같은 힘든 일을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모두가 “너는 노가다 하러 유럽까지 가냐?”라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말이다.


캠프 생활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우리는 직접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일주일마다 요리와 청소 팀을 정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점심, 저녁 메뉴를 결정하고 시내로 장을 보러 가곤 했다. 단 한가지의 요리도 할 줄 몰랐던 나는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불고기 양념을 한국에서 가져갔고, 내가 요리 당번이었던 그날, 나는 저녁으로 불고기와 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 외국인들이 불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고 알았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이야. 너무 맛있게 먹어준 친구들에게 나는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준비해온 선물을 나눠주면서 그 선물의 의미를 이야기해줄 때, 그때 외국 친구들은 너무나도 즐거워했다. 특히 효자손을 선물하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의미를 설명해주었을 때 나름대로 꽤나 뿌듯했고, 외국 친구들이 텐트 안에 선물 받은 효자손을 고이고이 걸어두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참 기쁘고 즐거웠다.


3주 동안의 워크캠프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참 많았다. 그 때마다 내 곁에는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농담을 해주고 나를 도와주던 외국인 친구들이 있었다. 워크 캠프를 오기 전 나에게 있었던 힘들었던 일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던 그 시간들.. 텐트 안에서 침낭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세르비아에서 온 친구와 옛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울고 웃던 추억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내 자신에 대한 많은 생각과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했던 순간들.. 넓고 푸른 잔디밭에서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들었던 진정 내가 꿈꾸던 평화..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조차 의심했던 나에게 다시 나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던 지난 3주간의 잊지 못할 추억들.. 외국인들조차 당당하고 용감하다고 칭찬했던 뜨거운 태양 아래 나의 모습들..


나는 22살이다. 아직 어리고 배울 것이 많기에 나는 새롭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도전하고 성공하고 설령 실패한다 할지라도 아주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것을 시도하고 깨달아가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의 20대가 반짝반짝 빛이 날 수 있도록 말이다.